행복에 대한 단상

행복에 대한 단상

에세이 자체를 읽은 지는 몇 년 되지 않았다. 내가 좋아했던 장르는 단연 소설 쪽이었어서, 항상 서점에 가면 소설 베스트셀러 자리에는 무엇이 올랐나, 어떤 스테디셀러가 자리를 지키고 있나 기웃거렸다. 언제나 한 권씩 집어 들고 오는 것은 소설 쪽이었다. 판타지 소설부터 역사, 연애, 추리소설까지. 그런데 어느 순간 에세이집을 읽으면서, 친구를 만나 허심탄회하게 고민을 잔뜩 나눈 것 같은 안정감을 느꼈다. 기억하기로는 지금은 돌아가신 장영희 교수님의 책,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을 읽었던 때부터다. 여러 에피소드들과 생각들을 글로 읽으면서 '내가 느끼는 감정이 이런 거구나' 하면서 배우고, '맞아, 그럴 때가 있지' 하면서 공감했다. 오래된 친구를 마주하는 것과 같은 친근함. 그것이 에세이의 매력이었다.

 

에세이를 골라 읽을 땐 나만의 법칙이 있다. 너무 감성적인 문구와 추상적인 어휘로 시선을 잡아끄는 제목을 가지고 있다면, 꼭 자극적인 헤드라인으로 클릭을 유도하는 인터넷 기사처럼 느껴져서 한 번 경계하게 된다. 책을 넘겼을 때 시(詩)도 아닌 글이 엔터가 많으면(모든 문단이 한 두 문장만에 끝난다면) 싸이월드 글 같아서 책을 내려놓게 된다. 또 사진집이 아니면서 사진이 너무 많으면, 그것도 또 인스타그램을 보는 것 같아 다시금 책을 덮는다. 아참, 물론 예외는 있었다. 이병률 씨의 책은 사진도, 글도 너무 좋아 꾸준히 보고 있다.

한편 <우리는 달빛에도 걸을 수 있다>는 브런치 북을 통해 알게 된 책이다.  브런치 상에서 에피소드 하나를 읽고 나서 바로 책을 사 보기로 결정했다. 저자가 엄마에 대해 쓴 에피소드였다.

https://brunch.co.kr/@daljasee/117

따뜻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고수리 작가의 글들을 읽다 보니 나도 엄마 생각이 났다. 꼭 기록하고 싶은 엄마와의 순간들이 내게도 있다.

 
01 이게 행복이야

모두 행복을 어디서 배우는지 묻고 싶다. 행복도 배우는 것이라는 데에는 모두 동의를 하시는지? 하긴 그렇지 않다면 행복에 관해 말하는 베스트셀러들이 그렇게 많이 팔렸을 리 없다.

행복도 배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책으로 배우고, 누군가는 경험에서 배우겠지만 나의 경우에는 사람에게서 배우는 것이라고 믿는다. 단 한 번도 행복한 사람 곁에 머무른 적 없다면, 행복해지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엄마에게서 배웠다.


엄마가 행복에 대한 정의를 아주 가볍고, 쉽게 내렸던 순간이 있었다. 행복이란 어쨌든 우리가 살아가면서 추구하는 최종 목표 같은 것이고, 아주 개인적이고 철학적인 감정이 아닌가. 듣던 나는 깜짝 놀라서, 잊을까 봐 얼른 공책에 적어놨다. 엄마의 행복은 잊고 싶지 않았으니까.

때는 어느 주말이었고, 우리 식구는 거실에 모두 모여 TV를 보고 있었다. 나는 책을 읽다, TV를 보다 했고 그것이 내가 대부분의 주말을 보내곤 하는 방식이었다. 엄마는 파인애플을 깎아 거실로 가지고 왔고, 나는 파인애플을 향해 데굴데굴 굴러 위치를 옮기고는 책으로 다시 파고들었다. 입에는 파인애플을 우물거리며 먹으면서.

"주말에 나는 자고, 우리 선아는 내 옆에서 책을 읽으면서 파인애플을 먹고. 이게 행복이야."

엄마는 말했다. 나는 내색은 안 했지만, 엄마의 행복이 이렇게 가까이, 아니, 가까이도 아니고 바로 지금 이 순간이라는 데에 놀라고 말았다. 행복은 가까이 내 안에 있는 거라고, 자기계발서에서만 얘기하는 것인 줄 알았는데 엄마의 행복이 지금 이곳에 있었다니.

그 이후로 역시 이보다 더 와 닿는 행복에 대한 정의를 찾을 수 없어져 버렸다. 또 다른 행복에 대한 좋은(그리고 개인적인) 정의를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공유해주세요.

 
02 따뜻한 우유 한 잔

어렸을 적의 나는 때때로 열감기를 앓았다. 열이 오르면 몸은 천근만근 무거워졌고, 옷을 아무리 껴입어도 몸에서는 냉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처럼 추웠다. 살갗이 예민해졌고, 이루 형용할 수 없는 방식으로 아팠다. 시간은 느리게만 흘러갔고, 피조차도 느리게 흐르는지 몸을 일으킬 때면 눈앞이 하얘졌다. 눈이 보이지 않아서 친구의 부축을 받으며 걸었다. 몸이 아프니 머리도 함께 아픈 것처럼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는 순간들이 훌쩍 나를 찾아와 괴롭히곤 했다.

"선생님, 저 아파요. 조퇴해야 할 것 같아요."

나는 학교 1층에 덩그러니 놓인 공중전화에서 엄마에게 전화를 해서 나의 아픔을 알렸고, 교무실로 찾아가 그렇게 담담하게 조퇴를 요청했다. 다행히 나의 담임선생님들은 나의 아픔을 별 의심하지 않았고, 나는 교실로 돌아와 홀로 책가방을 챙겨 수업시간이라 조용한 운동장을 가로질러 교문밖으로 나섰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길었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내딛을 때마다 살갗이 쓰렸다. 겨울이 아닌 데도 입김이 나올 것처럼 숨이 뜨거웠다. 목구멍으로 흘러나오는 숨이 가빴다.

집으로 돌아와 현관문을 열자 적적한 공기가 나를 맞았다. 우리 집은 언제나 오롯이 아침과 밤의 공간이었다. 가족들이 모두 모이는 시간이 아닌 낮에는 언제나 사람이 없었다. 부모님은 일을 나가시고, 동생과 나는 학교에 있을 시간이었다. 밝고, 고요한 집이 낯설었다.

옷을 갈아입고, 엄마에게 다시 집 도착을 알렸다. 자고 싶단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했다. 엄마는 일찍 들어오겠다고, 조금만 기다리라며 전화를 끊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불속으로 들어가 눈을 감았다. 너무 추웠다.

혼자 낮잠을 자고 일어나면 항상 기분이 나빴다. 너무 외로워서 기분이 나빴다. 자고 일어난 직후, 바보처럼 몽롱한 정신과 주변의 낯선 풍경, 아무것도 없는 적막함, 지나가버린 시간과 사라져 버린 색채의 쓸쓸함. 그런 느낌들은 내가 혼자라는 사실을 사무치게 확인시켜줬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결혼을 하고 나서도 혼자 남겨진 집에서 낮잠을 자고 나면 종종 그런 기분을 느꼈다.

─살아 있어 줘서 고마워, <우리는 달빛에도 걸을 수 있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흘렀을까. 엄마는 딸이 아프자, 직장에서 급히 집으로 돌아왔고 나의 상태를 살피고 나선 부엌으로 향했다. 우유를 중탕해서 데우고, 설탕을 섞어서 머그컵에 담아 쟁반에 받쳐 비몽사몽인 나에게 먹였다. 입맛이 하나도 없는데도 달고 따뜻한 우유는 몇 모금 삼킬 수 있었다.

그 이후로도 나는 몇 번 더 아팠고, 엄마는 몇 번 더 일찍 들어왔다. 항상 엄마는 설탕을 탄 따뜻한 우유를 아픈 나에게 가져다줬고, 그제야 나는 엄마가 돌아온 것을 알았다. 몸이 아프면, 평소에는 하지 못했던 요구를 엄마에게 했다. 내가 가장 바라던 것은 사실 엄마가 일찍 집에 들어오는 것이었다. 아픈 날에는 엄마가 일찍 들어와서 좋았다. 아픈 와중에도, 엄마가 집에 도착하면 안심이 됐다. 우유를 마시고 나선 죽은 듯이 잠만 잤다. 유난히 깡마르고 체력이 없던 내가 감기를 이기는 방식이었다.


겨울이 오자, 요새 회사에서 우유를 데워 먹는다. 나는 중탕까진 하지 않지만, 전자레인지에 데워진 우유를 받아 들고 설탕을 넣어 마실 때면 반사적으로 어린 시절의 내가 생각난다. 자동재생 버튼을 누른 것처럼 일련의 추억들이 빠른 속도로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공원에서 책을 펼치다

공원에서 책을 펼치다

아이디어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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