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사람들

나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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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2학년 때, 푹 빠져있던 사진 동아리에서 사진전을 준비해야 했다. 당시 나의 역할은 내 사진뿐 아니라 전시 자체를 기획하는 것이었는데 다른 친구들에게 사진을 찍으라 격려하고, 그들이 찍어온 사진을 골라내고, 조금 더 좋은 사진을 찍기 위해 같이 고민하고, 그런 일을 해야 했다. 동아리에서는 연구부장이라고 불렀고, 전시를 기획하는 사람이니 디렉터라고도 할 수 있었겠다.

우리는 1년에 두 번, 여름과 겨울 방학의 막바지에 전시를 열었는데 여름이 끝날 무렵 나는 겨울 전시는 주제를 정하고 사진을 찍어야겠다 싶었다. 조금 더 일관성 있는 사진들을 전시장에 걸어두고 싶었던 욕심 때문이었다. 여름 전시가 끝나는 날, 전시를 준비했던 모든 사람들이 둘러앉아 있었던 자리에서 다음 전시는 주제전으로 준비하기로 했다고 알렸다. 내 안에 오래 머물러 있던 단어가 망설임 없이 튀어나왔다. 내가 정한 주제는 관계였다.

 

아주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맺는 관계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전혀 공통분모가 없는 사람들이 어떠한 계기로 만나 서로 연결되고 영향을 주고받게 된다는 것은 언제 돌이켜봐도 신기했다. 오히려 피를 나눈 가족이 서로 지지고 볶고 같이 살아 나가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공통점을 갖게 되니까. 그러나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왔던 타인과 만나 어떻게든 부딪히면서 관계를 이어나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사자들의 노력이 수반되어야 할 일인데, 그걸 굳이 해나가는 것이 나는 놀라웠던 것이다.

말하자면 나는 각자가 지우개라고 여겼다. 태어나자마자 만나면 공장에서 갓 찍어져서 나온 상태라서 그 단면이 매끄럽게 딱 맞을 수 있을 터인데, 시간이 지나고 서로 다른 환경에서 다른 경험을 쌓으면서 다른 형태로 닳아져 버린 지우개 둘이 갑자기 만나면 그 둘은 절대 매끄럽게 딱 맞을 수 없다. 다른 모양이기 때문에 당연히. 그래서 새로운 남자 친구 또는 여자 친구를 만나 꼭 맞는 사람을 만났다며 행복해하는 친구들에게 나는 의심의 눈초리를 던졌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과 꼭 맞는 사람을 만나 사귀고, 너무 달라서 이별한다.

 

1년마다 반이 바뀌는 학창 시절을 끝마치고, 1년을 또 재수하고, 대학교를 다니면서 만났다 헤어지는 사람들의 수는 늘어만 갔다. 누가 내 곁을 스르르 떠났는지 눈치를 못 챘을 수도 있었는데, SNS는 너무나도 쉽게 사라져 버린 사람들을 내 눈앞에 갖다 놓았다. 굳이 안 그래도 되는 데도 그랬다. 그리고 어느 나이가 되자, 몇 명은 계속 내 옆에 남아 있었다. 아마도 어느 책에서 읽었던 구절이었던 것 같은데, 오랜 시간 잊히지 않는 말이 있다.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이 내 세계라고. (쓰다 보니 그것은 만화책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 말에 굉장히 공감하여, 내 세계는 그저 내 옆에 있는 사람들까지라고 믿고 있다. 그래서 딱 거기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저 바깥의 사람들이 나에 대해 어떤 말을 하는지는 내게 중요하지 않다.

 

내 옆에 머물러 주는 사람들이 나에겐 굉장히 소중한 하나의 세계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세계는 끊임없이 변화했다. 내가 미처 눈치채지 못했던 부분이 상대에게는 관계를 지속해 나갈 수 없는 중요한 이유가 되기도 했고, 오히려 내가 상대의 어떤 부분을 견디지 못하기도 했다. 물론 딱히 이유 같은 것이 없기도 했다. 그렇게 몇 명은 내 옆에 머물다가 사라졌다.

"시간이 흐르면서 관계가 변하기도 하는 게 자연스러운 거야. 인간관계도 사람의 생명처럼 생로병사 주기가 있어.”
기억해줘, 임경선

어차피 어떤 관계도 영원할 수는 없다. 상대가 내 곁을 떠난다 해도 그렇게 한때나마 서로를 깊이 사랑하면서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 그 이상 인생에서 무엇을 더 바랄 수 있단 말인가.
기억해줘, 임경선

사라져 간 사람들을 떠올리면 역시 슬프다. 내가 밀쳐낸 사람일지라도 그렇다. 나는 내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지 못했기 때문은 아닐는지 다시 돌이켜 본다. 사람들의 관계는 또 자석과도 같아서(요새는 에픽하이의 '연애소설'에 매우 빠져있지만, 원래부터 가지고 있던 생각임을 항변한다.) 서로 지나치게 가까워지면 멀어지고, 너무 멀어지면 그렇게 서로가 가지고 있던 자기장이 사라져 버린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래서 내가 지금 서있는 자리가 적절한 거리인지 자세히 살피려고 한다. 적당한 거리는 중요하다.

 

하지만 이미 너무 가까워져 버린 사람들은 나에겐 언제나 가장 어려운 숙제다. 많은 시간과 경험의 실타래로 얽히고설킨, 아니 오히려 단단히 묶인 내 옆의 사람을 속상하게 만들지 않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내가 고른 단어 하나, 내가 내뱉는 말 한마디, 나의 손짓과 행동 하나에도 내 사람들은 상처 입을 수 있다는 사실이 무섭다. 나를 굉장히 조심하게 한다. 그런데 잘 안 될 때가 많아 속상하다.

왜 사람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걸까?
기억해줘, 임경선

“어쩌면 사람들은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상처 주는 운명을 떠안고 살아가는지도 몰라.”
기억해줘, 임경선

내 마음은 이제 무뎌졌다고 생각했는데, 내 사람들의 마음을 다치게 했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단단하다 믿었던 내 세상에 큰 파도를 불러온다. 어지럽다. 더 잘 해주고 싶다. 더 친절하게, 더 다정하게. 세상에서 제일 잘 해주고 싶다. 그냥 다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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