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카카오톡

엄마의 카카오톡

민아가 일본으로 떠나고, 엄마는 며칠 후 스마트폰으로 바꿨다. 이유는 오직 카카오톡을 하기 위해서 였는데, 민아와 소통하기 위해선 이제 문자가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한국에서 보내는 것은 상관이 없으나 일본에서 보내는 문자는 가격이 상당하여 민아에게는 할 말이 있더라도 말을 생략하게 하는 충분한 이유가 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난 엄마가 휴대폰을 바꿨던 바로 그 날 저녁, 뭘 깔아놓았는지 가득 차 있던 휴대폰 바탕화면과 메뉴들을 싹 정리해 주고 카카오톡을 가르쳐 주었다. 문자를 즐겨했던 엄마는 금방 카카오톡의 방식을 익혔는데, 문자보다 채팅에 가까운 카카오톡은 속력이 아직 느린 엄마에게 좀 빠른 듯 싶다. 그래서 엄마와 카카오톡을 하는 사람들은 조금씩 엄마의 다음 한 마디를 위해서 기다려야 한다.

1(카카오톡에서 상대방이 나의 메시지를 읽었는지를 표시하는 숫자)이 없어지고 나서도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며 다음 한 마디가 뭘까 궁금해하며 기다리는 순간은 지루하기보다는 사실 꽤 기대되는 순간이다. 어느 시점부터 우리는 상대방의 말을 기다리지 않게 되었는데, 그것은 편리해지기 위한 과정이었지만 우리가 무언가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도 눈치채지 못하는 함정에 빠져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 손편지(e-mail 때문에 이제는 손이라는 접두어가 붙어버림.)를 쓰던 시절엔 상대방의 답변을 듣기 위해선 며칠은 기다렸고, 삐삐(이제는 유물.)에 전화를 달라고 전화번호를 남기던 때에는 한 시간은 기다릴 준비가 되어있었다. 문자를 주고 받을 때엔 몇 분 정도는 기다릴 수 있었다. 문자는 특히 짦게 쪽지를 남기는 것처럼 특별히 답변을 기다리지 않아도 될 때가 있었다.

지금은 그렇지가 않다. 기다림은 몇 초. 일단 이야기가 시작되면 그것이 끝나기 전까진 다른 일을 할 수 없다. 그 광경은 지하철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 지하철에 타서 내릴 때까지 화면 안 메시지 창에서 눈을 떼지 못 하는 사람들이 허다하다. 나도 예외는 아니라서 가끔씩 한 정거장 정도 지나치기도 한다. 모두 기다림의 순간들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엄마에게 카톡을 하고 나면 열심히 답변을 하기 위해 이모티콘을 찾아서 보낼 여유도 없이 꾹꾹 타이핑을 하는 엄마의 모습이 상상되는데, 그 모습이 상상되는 그 순간은 지금처럼 기다리지 않는 시대와 세대를 살고 있는 나에겐 매우 소중한 시간이다.

Starbucks Pot St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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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하고 싶은 마음, 2013